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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 수기 (글, 강원희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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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수현 작성일21-06-11 19:44 조회2,1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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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ID 19 Pandemic 을 겪으며

           강원희 (Weon Hi Kang)

                                       

며칠전에 집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간호사와 집근처 공원에 달린 산등성이를 한시간쯤 걸었다. 일주일 단위로 각자 근무 스케쥴을 보고 쉬는 날이 맞을 때마다 한두번 만나 걷기 시작 한 것은 작년 봄 코비드 판데믹을 호되게 당하고 나서부터였다. 일주일에 몇번씩 자주 걷는 이 길은 매번 걸을 때마다 조금씩 기분이 다르다는 것을 서로 얘기하면서 이 친구가 걸으면서 말했다. “작년에는 봄이 왔는지 마는지도 모르고 지냈어요. 근데 올해는 새파란 잎이 보이고 꽃이 이쁜 것도 보이네요.”  그 말에 나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판데믹 초기 코비드 치료에 대한 규정이 딱히 정해지지도 않았었고 환자 볼 때도 마스크를 하루는 껴라, 그 다음날은 끼지 말라고 할 정도로 우왕좌왕하던 시기에 그 친구가 뉴욕의 큰 시립병원 코비드 병실에서 환자를 보면서 코비드에 감염이 되어 죽을 고비를 넘긴게 자연스럽게 떠 올랐다. 자기집이었지만 2층에 혼자서 격리를 했고 누군가 뭘 갖다 줘야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있었다. 식구들과도 얼굴을 볼 수도 없이 철저히 격리를 해야해서 먹을 것을 방 앞에 갖다 놓고 가면 문을 열고 음식을 안으로 들여서 먹고 그릇도 장갑을 끼고 뜨거운 비눗물로 씻어서 내 놓았다고 했다. 특히 밤에 열이 나기 시작하면 타이레놀을 먹고 있어도 오한이 나고 정신이 없어지는데 정말 이러다 혼자 죽겠구나싶어서 정신이 날 때마다 어떻게 병이 진행이 되는지 일지를 적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아이들과 식구들에게 유언장까지 써 놓았다고 했다. 물론 긴급 상황을 대비해서 응급실로 갈 작은 가방은 준비가 되어 있었고 은행구좌와 비밀번호등에 은퇴연금 타는 방법까지 자세히 적는 것도 적어 놓았다고 했다.

 

그 때 나는 이 친구가 아프다는 얘기를 들은 순간 바로 전화를 했었다. 목소리라도 들어주고 내가 뭘 해 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 때는 말라리아 치료약으로 알려진 하이드록시퀴놀론을 치료약으로 쓰고 있을 때여서 한인약국 여러 곳으로 전화해서 그 약을 보유하고 있는 약국을 찾아서 기침약과 함께 처방을 일단 보냈다. 마시는 것을 제대로 못하니 마음 같아서는 가서 링겔이라도 놓아주고 싶었으나 지금같이 치료 방향이 정해진 것도 없고 개인보호장비도 충분치 않은 상태라 마음만 바쁘고 안타까웠다. 다행히도 이 친구는 그 약을 먹으면서 물이나 음료를 많이 마셨다고 했다. 낮에는 전화나 문자 받으면 일일이 답장하고 통화를 하면서 무료함을 달래고 가능한 방안에서 움직이고 걷고 한 덕분인지 약을 먹기 시작한 이틀후부터는 열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서서히 기운을 차릴 수가 있었단다.

 

이 친구의 코비드와의 2주간의 처절한 투병은 이렇게 말하기엔 평범한 코비드 투병쯤으로 쉬워 보이지만 개개인으로는 정말 힘들고 무서운 경험으로 이해가 된다. 하지만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에 비하면 이 친구의 힘들었던 경험은 비교할 수가 없이 더 무섭고 처절한 백전백패에 가까운 전쟁이었다.

 

 코비드 사태가 나면서 병원들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일반 병실이나 시술실 회복실들을 중환자실로 바꾸었다. 그 급조된 중환자실에는 일할 사람들이 절대로 필요한지라 의사, 레지던트, 인턴, 나 같은 NP(Nurse Practitioner), 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 비서, 보조원등의 치료팀이 필요하므로 팀을 급조해서 만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중환자실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나 나름 경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군인들 처럼 차출을 해서 팀을 만들어 나갔다. 나도 어느날 밤에 빨간 글씨의 볼드체 이메일 하나로 중환자실의 진료팀 멤버로 차출이 되었다. 20년이상 밤근무를 안 했는데 일요일 밤 첫 출근이 걸려 그냥 나가게 되었다. 밤근무로 저녁 6시에 출근을 하니 큰 대학병원 안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어도 처음보는 사람들과 한 진료팀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모두 바짝 긴장이 된 상태에 첫 인사로 서로 이름을 교환하고 잘해보자한마디로 첫 코비드 중환자실 일을 시작했다. 그 때 바로 내가 그 중환자실에서 할 수 없는 일이 엄청 많다는 것을 걸 알았지만 그에 대한 당혹감은 그 상황에서는 바로 사치로 느껴졌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을 해서 하고 모르는 일은 물어가며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미리 준 치료방침은 이메일로 들어 와서 각자 숙제로 공부는 하고 왔고 치료약이나 검사 오더의 지침은 각 컴퓨터 앞에 붙여 놓아서 일 시작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계속 방송으로 나오는 코드블루를 들으면서 가슴이 섬찟해지기 시작했다. “코드블루후에는 그 환자가 호흡기를 끼고 내가 일하는 중환자실로 한시간 안에 온다는 뜻이다. 그래서 코드만 나면 조바심이 나고 걱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30대 후반의 그날 밤 팀리더로 온 내과의사는 “50세가 넘은 환자들이 이 중환자실 안에서 코드가 나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대응을 해라, 어차피 살 확률은 희박하니까란다. 심폐소생술은 어디든 기본인데 그것을 천천히 하라는 말은 그냥 조용히 편하게 죽게 두라는 뜻이었다. 이 말을 들으니 코비드 걸리면 50세가 넘은 나도 죽은거나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어 참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신경을 쓸 틈도 없이 밀려드는 환자들 중에 70대 말의 부부가 남편 환자는 호흡기 끼고 내가 일하는 중환자실로 오고 있고 아내는 4층 병실에 입원해 있다고 했다. 이렇게 부부가, 모녀가, 형제자매들이 함께 입원이 된 경우가 셀 수도 없이 많았고 하루도 안되어서 내가 일하는 중환자실도 침대가 꽉 차 버렸다. 이 중환자실의 환자들을 어떻게든지 호흡기를 떼고 병실로 다시 보내야 하는데 그렇게 열심히 집중치료를 하는데도 도무지 깨어날 생각들을 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반 중환자들은 호흡기를 달아놓고 숨쉬는 것만 며칠 도와줘도 조금 편안해 지니 쉬면서 회복이 되는게 보통인데 이 코비드균은 전혀 다른 별종으로 우리몸의 장기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폐를 시작으로 뇌, 심장, 콩팥, , 혈관들을 샅샅이 휘젓고 다니는 것이 보였다. 보통 협심증환자들의 피검사 결과는 100으로 나온다고 할 때 코비드 환자들의 경우는 3,000-4,000 씩 경악할 정도로 높아서 코비드가 협심증으로 보이게 우리 혈관을 교란시키는 것이 훤히 보였다. 이틀째 밤 출근을 하니 전날 본 환자들이 다 보여서 일단은 안심을 했다. 전날 있던 환자가 보이지 않으면 대부분 하늘나라로 간 것이니 보이는 것이 마음이 더 놓이는 때 였다. 하루는 한 환자가 복부가 너무 팽창되어 보여서 위에 튜브를 꽂아 개스를 좀 빼야겠다고 꽂았더니 개스가 아니라 시커먼 피가 나오기 시작을 했다. 내출혈이 되어 위장관에 몇시간 있은 듯 했다. 물론 수혈이 바로 시작이 되었으나 갑자기 열이 104도로 오르면서 패혈증 증세로 치료진들을 정신을 못차릴만큼 극도로 상태가 나빠졌다. 그 환자 담당인 일본인 간호사는 매우 침착하고도 노련하게 하나하나 일을 해 주어서 내 근무시간에는 큰 일이 나는 것을 무사히 막아준게 너무 고마웠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코비드 전쟁터로 일을 나가면서 매일 출근시간에 운전대를 잡으면서 기도는 저절로 나왔다. “어제 본 환자를 오늘 다시 보게 해 주세요. 오늘도 사망진단서를 안쓰게 해 주세요. 제 환자 가족들에게 말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판데믹이 끝나는 것은 아직 멀었을 것 같으니 당장 내 앞의 지금 해야 하는 일에 집중을 해서 기도하고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루 한번씩 환자 치료에 대한 라운딩이 끝나면 그날의 진료 노트를 쓰면서 가족들에게 전화를 해 주고 그 날의 환자상태를 알려주는 것이 내 일의 한부분이었다. 대부분 가족들은 하루에 한번씩 병원에서 걸려오는 전화통화에 희망을 걸고 기다리고 있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전화를 할 때는 조심스럽게 신중하게 말을 해야 했다. 60대 초반 한 남자 환자의 자녀들은 우리가 하는 얘기에 집중을 해서 적으면서 듣고 각자 인터넷으로 공부를 한 흔적이 보일만큼 통화중의 의학용어를 많이 이해해 주어서 많이 고마웠다. 그 환자는 깨어날 시간이 되었는데도 안 깨어나서 뇌검사를 했더니 뇌졸증으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2주동안을 열심히 공들여 하루하루 조금씩 깨어나게 한다고 치료를 했는데도 치료진과 가족들의 간절한 마음들을 버리고 내가 쉬는 주말에 돌아가셨다고 들었을 때의 허탈함은 참으로 망한기분이었다. 50대 후반의 한 엄마는 우리 중환자실에서 깨어날 생각도 못하고 있으나 딸은 뉴욕 업스테이트 알바니병원 중환자실에서 좋아지고 있다고 들었을 때는 그나마 딸이라도 좋아진다니 다행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 엄마는 5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답답했다. 그 옆의 남자분은 64세로 늦은 결혼에 9살 짜리 아들이 있다고 소셜워커가 얘기를 해줘서 알게 되었다. 그분의 부인은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을 하는데 판데믹으로 일이 없어 남편의 수입으로 살아야 했는데 남편이 저렇게 누워 있어서 두 모자가 살길이 막막하단다. 소셜워커는 이 환자의 장애자 신청을 환자가 살아 있을 때 해 줘야 효력이 있는데 진료팀이 너무 바빠서 회진 따라다니면서 신청서 써 줄 사람을 찾다가 드디어 나한테 오게 된 것이었다. 그 날 회진 후에 10분정도 시간을 내서 신청서는 썼고 그것을 신청한 후 이틀 만에 9살 아들은 아버지를 잃었다. 이런 소소한 개인 사정들이 너무나 많아서 쓸 수가 없을 만큼 각각 코비드 병실에 일한 사람들은 코비드로 부터의 상처가 크다. 돌아가신 분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치료를 받고 나은 사람들은 나은 사람대로, 치료를 하는 사람들은 치료를 하는 사람대로 환자들의 개개인의 스토리를 보고 경험하면서 받은 가슴의 응어리들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일을 하는 병동은 코비드 당시 중환자실로 급조되었던 내가 평소에 일하던 병동이어서 코비드 중환자실 일을 할 때 있었던 환자들의 각각의 침대마다 환자 각기의 누워있던 모습들이 기억이 난다. 2번 베드는 스페니쉬 아줌마, 6번은 심장수술 받았던 60대 남자, 5번 침대 90세 할머니는 호흡기 떼고 노인네라고 그냥 죽게 하면 안되지, 화이팅!”을 속으로 외치며 일반병실로 보내며 좋아했는데 그 다음날 병실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젠장!” 할 수 밖에 없었다. 코비드 폭풍 시작후 2- 3개월이 지나고 나서 코비드 중환자실 첫날 일했던 내과의사와 앉아서 환자들 명단을  보면서 우리가 치료했던 환자들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가 궁금해 돌아보게 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우리 앞에 살아 남아 있는 환자는 안과의사였던 40대 중반으로 코비드 후유증으로 뇌졸증이 있어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이 환자를 포함해서 우리가 일한 중환자실에서 살아 남은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으로 셀 정도 밖에 없었다. 그 긴 시간동안 그렇게 힘들게 일했는데 우리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니?” 하고 물었더니 그냥 어깨를 으쓱하는게 대답으로 왔다.

 

코비드는 우리 한인사회도 차별을 주지 않고 회호리 바람처럼 쓸고 지나갔다. 사무실에서 보던 경상도 사투리를 아주 구수하게 쓰시던 90세 환자는 코비드로 남편 보낸지 일주일 만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떤 60대 여자분으로 항상 밝음으로 사무실에 나타나곤 했었는데 소식이 없어 친지가 아파트를 들여다 봤더니 룸메이트와 함께 사망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내가 다니는 성당에도 부고가 셀 수도 없이 카톡방에 올랐었다. 한 라디오 방송에서 현재 코비드 상황안에서 실제로 일하는 사람을 인터뷰를 한다기에 용감하게도 하겠다고 했다. 무슨 일이든 일단 걸리지 않게 하는게 최선책이었으므로 무슨 방법이든 써서 사람들에게 코비드의 실제 상황을 알리고 걸리지 않도록 알려야 했다.

 

그 인터뷰에서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했는데 그 때의 내 대답은 죽을 힘을 다해서 집에 계세요. 살고 싶으면 집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 였다. 특히 한국사람들은 평소에 아파서 입원하게 되어도 음식도 안 맞고 의사소통이 안되어 힘든데 코비드 상황에는 보호자는 아예 방문도 안되고 의료진들은 환자와의 접촉을 최소화 하라니 아주 기본적인 일 외에는 잘 들여다 보지도 않고 밖에서만 주로 모니터를 했다. 환자들은 얼마나 황당하고 힘들었을까. 코비드로 입원한 한 한국인 간호사는 밤이 제일 무서워요. 아무도 안오는데 이러다 혼자서 그냥 죽어도 모를 것 같애요하면서 밤 시간동안의 외롭고 무서움을 알려주었는데 그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다행히도 조심을 많이 하면서 백신이 나오고, 코비드 치료방법에도 많은 발전이 있어서 환자 숫자가 많이 수그러졌다. 하지만 언제 다시 변형된 코비드로 감염률이 올라갈지는 아직도 안심하기엔 많이 이르다. 코비드가 우리의 2020년을 통채로 다 삼켜 버리고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을 변형시켜 버린데 대한 상황을 뭘로 결론이 지워질지도 잘 모르겠다. 먼 훗날 역사로만 기억이 남게 되지 않을까, 그러면 죽을 고생을 한 우리 모두가 너무 억울할것 같은 생각이 든다. 코비드로 인해 의료계는 화상통화로 진료를 하는 텔레헬스 시스템등이 많이 앞당겨 졌다. 작은 시술이나 수술후에 병원에서 하룻밤 관찰하고 퇴원하던 것을 당일 퇴원을 시키는 등 환자치료 면에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우리들 각자가 겪은 상처 (트라우마)에는 결론이 나질 않을 것 같다. 아직도 침대 13번에 있던 의사였던 환자의 마지막 모습, 61세 천식이 있었던 여자환자로 유일하게 살려서 병실로 보냈던 그 기분이 그냥 기억에 생생하다.

 

그 코비드 에픽센터 병원에서 일하면서 코비드를 초기에 호되게 경험한 간호사 친구와 내일 다시 공원길을 걸을 예정이다. 걸은 후에는 내가 따뜻한 커피와 아침을 사줘야겠다. “우리 살아 남느라 참 많이 애 썼다고 등 두들겨 주면서 보듬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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